멀다. 진짜 더럽게 멀다. 가도 가도 끝이 없다. 그래도 하나도 안지겹다. 창밖엔 끝없는 목초지가 펼쳐지고, 간간히 물소와 백로들이 스쳐지난다. 나무, 숲, 시골을 좋아하는 천성은 타고난 것. 그래도 심심하긴 심심하다. 캘리포니아 키싱을 바르고 츕츕거린다. 슈팅스타 맛이 난다. 다음에 누군가와 키스할때 발라야지. 비비안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한다. 사람 좋아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다. 야무져보이지만 의외로 어리버리한데 그게 귀여워보인다. 40대 초반, 털털하지만 천상여자다. 피부에 신경을 많이쓴다. 눈웃음이 예쁘다.  다이버 라이센스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언젠간 꼭 따야지.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다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욕심은 많은데 게으르고 근성이 부족하다. 그래도 하나에 꽂히면 정신못차리고 빠져드는 오타쿠 기질은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흩날리던 빗방울은 스콜급 소나기로 바뀌었다. 긴코원숭이들이 비를 피해 숨으면 곤란한데... 긴코원숭이는 바나나를 먹지않고 맹글로 나뭇잎을 먹는다. 맹글로 나무는 바다와 민물이 만나는 곳에서 서식한다. 비타민제를 두고왔다. 손가락 끝을 보면 금새 티가 난다. 과일을 그렇게 먹어도 소용이 없나... 망고, 파파야, 오이, 토마토, 메론, 수박... 얼마나 많은 과일을 먹었는데... 역시 약물이 직효과구나. 점점 더 먹는 약이 늘어나는 약물의존자의 궁색한 변명이다. 이번 여행에는 특별히 복용중인 약이 하나 더 늘었다. 의외로 약물 부작용은 별로 느끼지 않는 편이라 걱정했던 증상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다행이다. 끝없는 초록의 초지. 한참을 쳐다봐도 좋다. 창문에 찰싹 붙어 눈동자를 굴린다.  









클리아스 리버 klias river . 발음이 예쁘다. 지붕 곳곳에서 비가 새는 고즈넉한 오두막에서 사바 티(팜 종류)와 코코넛 떡, 바나나 튀김, 도넛, 천연색소를 입힌 떡을 먹는다. 비는 그치질 않고, 그래도 결국 아름다운 석양을 보여주길... 아멘! 캐빈에 턱시도 고양이가 있다. 꼬리가 잘려있고 장갑을 꼈다. 하쿠 보고싶다. 아까 고양이를 부탁했던 친구에게 하쿠의 사진을 받았다. 하쿠는 내가 없어도 잘 지낸다. 서운하다. 잘 못지냈으면 좋겠다. 입맛도 없고 잠도 잘 못잤으면 좋겠다. 날 그리워하는 존재가 세상 어딘가엔 있었으면 한다. 








작은 보트를 타고 강을 따라 간다. 처음엔 잘 보이지 않던 긴코 원숭이들이 눈에 익기 시작한다. 반짝반짝 노란 등짝을 보이며 나뭇가지 위를 걷는다. 보트의 엔진소리가 너무 커서 미안하다. 그들에겐 우리가 침략자고 이방인이겠지. 우리가 그들을 보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를 구경하고 있다. 뉘엿뉘엿 해가 저문다. 비는 그쳐간다. 비오는 강가는 어쩐지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 The Scent of Green Papaya' 같은 게 떠오른다. 사실 그린파파야 향기에서는 비오는 강가의 풍경같은 장면은 없는데도 말이다. 트란 안 훙 감독의 화면은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처럼 몽환적이고 운치있기 때문일거다. 배도 좋아하고 물도 좋아하고 나무도 좋아한다. 사실 난 싫어하는 게 별로 없다. 굳이 꼽자면 추위와 배고픔 정도가 될까. 먹구름이 조금만 걷히면 좋겠다. 새빨간 석양을 보고싶다. 작은 보트의 선장은 긴코원숭이가 자주 앉아있는 스팟을 알고 있다. 배를 세울때마다 열심히 하얗고 긴 꼬리를 찾는다. 차로 두시간, 보트 두시간. 거기에 보트의 매쾌한 매연과 엔진소리, 그리고 덜컹거림은 곧 두통을 불렀다. 이와중에 선장은 악어를 찾겠다며 플래쉬를 비춰댄다. 과잉친절은 사회악. 시야까지 불편해지니 공황장애가 올 지경이다. 강의 수심은 40m. 오-주여!!! 선장이 기어코 악어를 찾아냈다. 하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시력 굉장하네... 해가 저문다. 강가에서의 석양도 매력적이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곧 해가 저물고, 선장이 강가의 나무에 플래시를 비췄다가 끈다. 아... 수백개의 반짝임.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반짝인다. 반딧불 한두마리는 본 적 있는데 이렇게 커다란 나무에 반짝반짝 거리는 광경은 처음이다. 비가 온 뒤라 나뭇잎 안쪽에서도 반짝여서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한장면이 오버랩된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나무마다 반짝이는 불빛에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우와-우와! 신비롭고 다신 못볼 장면이다. 너무 예뻐! 선장이 반딧불 한마리를 잡아 내 손에 쥐어줬다. 몇초동안 살짝 쥔 손 안에서 반짝이다가 손가락틈으로 날아가버렸다. 아... 기분 되게 묘하고 좋다! 야 내가 지금 완벽하게 자연 속에 있다! 어떤 카메라로도 잘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내 카메라에도 그저 반짝이는 한두개의 점으로 찍혔을 뿐. 그 장면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을까.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와 오징어튀김과 김치볶음밥을 먹었다. 물론 맥주도...  요즘 매일 저녁 맥주를 마시고 있다. 타이거 맥주는 신맛이 좀 더 강하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으니 그냥 마신다. 카프리나 드라이피니쉬, 카스에 익숙한 취향이다. 돌아가는 버스 맨뒷자리에 가방을 베고 눕는다. 시골길이라 야경은 볼게 없다. 귀에 아이팟을 꽂고 페퍼톤즈를 듣는다. 여행과 참 잘 어울리는 음악들이다. 귀에서 고름이 나올 정도로 듣고 있다. 최근 일주일간 가장 많이 들은 목소리. 나는 아마 귀여운 비음의 신재평에게 반한 것 같다. 소개시켜주세요. 까만 버스천장을 본다. 간간히 카톡이 온다. 하쿠는 잘 지내고 있고, 싸이뮤직은 아직 내 글의 레이아웃을 편집하지 못했나보다. 여행 전에 보내려고 부랴부랴 열심히 썼는데 괜한 조바심이었나보다. 마감일 같은 건 없는 프리랜서+발룬티어의 일이라는 것이 그렇다.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면 된다. 대신 하기로 한 것은 꼭 하는 게 나의 신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즐거워야 한다는 것. 내일은 유황온천에 가기로 했다. 마누칸 섬을 가려다가 온천도 좋아하니까... 산보수준의 산행도 있다고한다. 매일 약을 먹고있다. 몸의 컨디션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혼자 괜찮냐고. 혼자 가서 좋냐고. 혼자 가도 좋냐고 묻는다. 응. 이제 난 내가 혼자라는 것도 잊을만큼 잘 지내고 있다. 인간이란 처해진 환경에 어떻게든 적응하게 되어있다. 차의 에어컨바람이 차다. 가디건과 얇은 숄을 꺼내덮는다. 준비성, 에이형 특유의 그것은 모든 상황에 초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  







검정치마의 강아지. 한 부분에 공감했다. 후렴구도 자꾸 맴돈다. 라즈베리필드의 소이가 부른 wanna be loved. 비틀즈 The Beatles 의 strawberry fields forever 에서 따온건가. 간결해진 기교가 더 섬세하다고 생각한다. 아코디언과 클래식기타(아마도-) 음색 좋다. 이 곡은 원곡도 굉장히 좋아했었어. 아직도 밖은 어두운 목초지. 왕복 이차선의 멈춤없는 국도질주. 신호도 없고 고속도로도 없는 이 곳. 잠들 수 없다.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가사를 곱씹는다. 이건 두사람 정도밖에 발견 못한건데 나는 다른 사람보다 검은 눈동자가 크다. 눈을 오랫동안 가만히 들여다 본 사람만 알 수 있다. 의외로 수줍음이 많아서 사람과 눈을 잘 맞추지 못하기 때문에 눈맞춤은 정말 가깝고 많이 믿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사실은 내 몸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까맣고 커다란 눈동자.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다. 







만타나니에 꼭 가보고싶었는데 다들 말린다. 멀다고 한다. 가고싶은 이유는 발음이 귀여워서... 그정도의 이유니까 못가도 괜찮다. 호텔로 들어와서 오늘 하루의 짐을 하얀 시트 위에 쏟는다. 내일의 가방을 미리 챙겨둔다. 이것도 버릇이다. 나는 머리가 나쁘니까, 미리 준비해두지 않으면 늘 불안하다. 양치를 하면서 카메라와 아이폰을 충전한다. 뱀의 허물처럼 옷가지를 벗고 얼굴가득 거품을 문지른다. 빨개졌다. 썬크림을 발라도 탔나보다. 아침에 마켓을 쏘다닌 게 아무래도 자극이었다. 팩은 하나만 가져왔기 때문에 여분이 없다. 수분크림을 듬뿍 발라야겠다. 샤워부스에 들어가서 쪼그려앉는다. 체온보다 뜨거운 물을 한참 맞고있다. 잠자는 것, 먹는 것 다음으로 행복한 순간이다. 스크럽+젤 타입의 토탈에너지 바디워시. 바디샵의 거의 전 제품라인을 사용했다. 진저와 베르가못 향이 진하게 퍼진다. 마사져는 안가져왔다.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마사지를 한다. 이 호사스러운 시간에 감사한다. 이 행복함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샴푸는 레인포레스트. 이름부터 마음에 든다. 르네 휘떼르와 러쉬의 샴푸만큼 좋아한다. 하지만 컨디셔너는 좀 더 리치했음 좋겠다. 화이트 머스크 바디로션을 안가져왔다. 동남아여도 보습해야되는 극건성 피부. 마음도 극건성. 갑자기 뜬금없이 전화해서 '너 나랑 친하지?'라고 묻던 친구가 떠오른다. 응. 당연하지. '애들이 안믿어.' 무슨애들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별로 누굴 살뜰히 챙기거나 연락을 자주하는 성격이 못된다. 내 친구들은 그에 비해 다들 날 잘 챙겨준다. 과분한 복이다. 그래도 추억, 공감, 위로, 이해가 한순간이라도 있었다면 내겐 모두 친구다. '친구라고 하는데 사실 난 걜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던 사람이 두명정도 있었다. 속으로 좀 무서웠다. 언젠간 나와의 관계도 부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였을까. 아니다. 언제나 그렇게 쿨하고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 하나도 안멋있다. 별로다. 갑자기 이별이 떠오른다. 나는 쿨했고 상대방은 쿨하지 못했던. 내가 구질구질했고 상대방은 쿨했던. 서로 구차한 변명만 빙빙 돌려말했던. 서로 쿨하게 끝이라고 했던. 여러가지 모습의 이별들. 하지만 완벽하게 쿨한 이별은 없다고 생각한다. 서로 진심이 아니였다면 몰라도. 진심이었던 사람은 찌질해지거나 아니면 죽을 힘을 다해 쿨한 척 하는 것 뿐이다. 혼자서 속이 문드러지거나 몇몇 친구들에게 청승떨기도 하고 아무에게나 속내를 털어놓기도 한다. 둘이서 한 약속들을 혼자서 실행하기도 하고 말이다. 







Posted by LEERU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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